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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나부(桓那部)는 고구려 초기 5부의 하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환나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보이는 계루부(桂婁部)와 같은 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순노부(順奴部)로 보는 견해가 많다. 삼국지 등 중국기록에서만 발견되는 순노부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환나부와 동일한 실체이다. 환나부 출신의 인물들이 1세기 무렵인 태조 때부터 패자(沛者), 우태(于台) 등 높은 관계(官階)를 수여받았다. 계루부의 연타발은 상단을 꾸려서 축출되고 그 나머지 친척이 환나부(동부, 절노부)로 들어갔다. 계루부의 성이 고씨로 바뀐 것이며, 왕위 세습이 바뀐 것은 주몽성왕이 나라를 세운 그 때부터이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는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비류나부(沸流那部), 환나부(桓那部)의 5부체제(나부 체제)였다. 퇴출된 세력은 지방에서 소국이나 분국의 왕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이 한나라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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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환나부(桓那部)는 고구려 초기 5부의 하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환나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보이는 계루부(桂婁部)와 같은 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순노부(順奴部)로 보는 견해가 많다. 삼국지 등 중국기록에서만 발견되는 순노부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환나부와 동일한 실체이다. 환나부 출신의 인물들이 1세기 무렵인 태조 때부터 패자(沛者), 우태(于台) 등 높은 관계(官階)를 수여받았다. 계루부의 연타발은 상단을 꾸려서 축출되고 그 나머지 친척이 환나부(동부, 절노부)로 들어갔다. 계루부의 성이 고씨로 바뀐 것이며, 왕위 세습이 바뀐 것은 주몽성왕이 나라를 세운 그 때부터이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는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비류나부(沸流那部), 환나부(桓那部)의 5부체제(나부 체제)였다. 퇴출된 세력은 지방에서 소국이나 분국의 왕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이 한나라의 실체이다. 1세기 경부터 환나부 출신들이 패자(沛者) ·우태(于台)등 주요 관직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아 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제6대 태조 대왕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2년 겨울 10월, 왕이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치고,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를 삼았다. 서기 147년(차대왕 2년)에 측근 세력이었던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미유(彌儒), 환나부(桓那部) 우태(于台) 어지류(瘀支留), 비류나부(沸流那部) 조의(早衣) 양신(陽神) 등을 각각 좌보(左輔)와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였다. 신대왕 시대의 핵심 세력인 연나부 일파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반정 공신이던 환나부 출신 관료들과 인척 관계를 맺은 듯하다. 그 때문에 환나부의 일부귀족들도 외척의 반열에 오른다. 왕실의 외척 어비류는 환나부의 패자로써 중외 대부로 있으면서 좌가려와 함께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 환나부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사흔주에 많은 지방귀족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 지방 귀족들의 중심은 사하씨의 성을 가진 4부 중 하나인 환나부, 수호신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면서도, 침착함의 상징인 현무의 땅이다. 분류:고구려 분류:한나라 분류: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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