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국[黃龍國]은 단재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북부여국의 별칭이다. 유리왕 27년 봄 정월에 왕은 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서 용맹을 떨치며 힘 자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황룡국 왕이 파견한 사신에게서 들었다. 해명에게 기증한 활은 强弓(강궁) 이였는데 그 사신을 대면하고는 끌어당기니 뿌러져 버렸다. 또는 황룡국은 유리왕의 해명태자를 초대하였다. 어떤 이가 이는 황룡국의 속임수에 걸리는 게 된다고 말렸으나 해명은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라며 태자가 황룡국에 당당히 갔다. 그 당당함에 눌려 감히 해치지 못했다. 황룡국왕은 해명태자에게 강궁을 꺽길 권하였다. 해명태자는 강궁을 간단히 꺽어 고구려가 강대한 나라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유리왕은 동부여를 두려워하였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황룡국을 두고 유리명태왕이 태자 해명을 죽이면서까지 충돌을 피하고 싶어했던 나라였다 국내의 귀성 선우씨(鮮于氏)는 황룡국(黃龍國)에서 왔다.
황룡국[黃龍國]은 단재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북부여국의 별칭이다. 유리왕 27년 봄 정월에 왕은 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서 용맹을 떨치며 힘 자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황룡국 왕이 파견한 사신에게서 들었다. 해명에게 기증한 활은 强弓(강궁) 이였는데 그 사신을 대면하고는 끌어당기니 뿌러져 버렸다. 또는 황룡국은 유리왕의 해명태자를 초대하였다. 어떤 이가 이는 황룡국의 속임수에 걸리는 게 된다고 말렸으나 해명은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라며 태자가 황룡국에 당당히 갔다. 그 당당함에 눌려 감히 해치지 못했다. 황룡국왕은 해명태자에게 강궁을 꺽길 권하였다. 해명태자는 강궁을 간단히 꺽어 고구려가 강대한 나라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유리왕은 동부여를 두려워하였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황룡국을 두고 유리명태왕이 태자 해명을 죽이면서까지 충돌을 피하고 싶어했던 나라였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도절은 유리명왕과 갈등을 빚어 자살하였고, 둘째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유리왕은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遷都)하였으며 이후 선비(鮮卑), 양맥(梁貊), 황룡국(黃龍國) 등을 정벌하는 등 주변국과의 전쟁을 통해 더욱 강대해졌으며, 강한 리더쉽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정책을 폈다. 국내의 귀성 선우씨(鮮于氏)는 황룡국(黃龍國)에서 왔다.